조선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중간지역인 아소완 근처 니네(仁位)에 상륙했다. 하지만 급습당해 장수들을 비롯한 100여 명의 군사가 죽었다. 전투는 소강상태에 이르고, 양측은 타협을 시도했다. 조선의 입장으로는 해양작전이 곤란해지는 음력 7월 이전에 철수하는 것이 바람직했고, 대마도주는 항복 의사를 전달했다.
이종무는 정벌을 성공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7월 3일 대마도에서 철군했다. 불과 15일 동안의 작전이었다. 제대로 된 전투가 이뤄지지 않았고 전리품도 빈약한 대규모 해외 원정이었다. 만약 현장 사령관인 이종무가 조선을 겨누는 비수인 대마도를 점령한 뒤 일본 본토의 혼란을 이용해 영토로 편입시켰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렇다면 조선은 해양 국방을 소홀히 한 것일까.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태조는 고려 말 대마도 정벌을 시도했던 박위를 책임자로 삼아 1393년 각 도에서 전함을 건조했다. 각 도에는 함대사령관에 해당하는 수군 절제사를 임명했다. 또 용산에 나가 신형 전함의 진수식을 참관했다. 태종도 전문적인 관청을 만들어 약 428척의 전함을 1408년 613척으로 늘렸다. 세종은 중국·일본·유구의 선박들을 연구한 뒤 장점을 취해 전선을 개량했다. 1420년에는 한강의 양화도에 행차해 신형 전함의 성능 시험을 참관했다. 1432년 조선의 전함은 무려 829척이었다. 1469년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각 도가 구비한 선박 숫자를 기록했고, 수군 숫자를 4만8800명으로 규정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선 8도에 배치된 수군 병력이 4만9317명이라고 했다. 대한민국 해군 병력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또 ‘부산포’ ‘내이포’ ‘염포(울산)’ 등 왜관에 거주한 수천 명의 왜인은 조선의 정책에 점차 불만을 나타냈다. 1510년에 대마도주의 지원을 받은 4000~5000명이 내이포(진해)를 시작으로 부산포(동래)를 점령했다. 이 ‘삼포왜란’으로 관군이 습격당하고 796가구가 소실됐다. 이후에 왜구들은 다국적 해적집단으로 변모해 조선의 해안과 중국의 전 해안을 유린했다. 그런데 조선에선 이 무렵 ‘방왜육전론(防倭陸戰論)’이 등장했다. 해전능력이 뛰어난 왜구를 해상에서 상대하기보다 육지로 끌어들여 격퇴한다는 전략이다. 권력을 장악하고 본격적인 당쟁에 뛰어든 사림(士林)들은 미봉책으로 해양을 포기했고, 그 결과 조선은 국방력의 약화와 임진왜란이라는 대참사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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